기요스 회의 - 센고쿠 쇼군 지도
What happened in the 1582 기요스 회의: the background, how it unfolded, its outcome, and the sources behind each point.
1582년 (덴쇼 10년 6월 27일) 오와리국 기요스 성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적자 노부타다가 사망한 뒤, 시바타 가쓰이에·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이케다 쓰네오키의 네 숙로가 오와리국 기요스 성에 모여 오다 가의 후계와 유령 분배를 논의한 회의다. 노부나가의 적손인 산보시가 가독을 이었고, 노부카쓰가 오와리를, 노부타카가 미노를 領하게 되었다.
背景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적자 오다 노부타다도 같은 시기에 사망하여, 오다 가에는 누가 가독을 이을 것인가, 또 노부나가의 옛 영지를 누가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아케치 미쓰히데를 야마자키에서 격파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기나이에서 세력을 키웠으나, 노부나가의 아들인 노부카쓰·노부타카, 유력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 등의 처지는 각각 달랐다. 기요스 성에 모인 네 숙로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후계와 유령 분배를 논의했다.
結末
산보시가 오다 가의 가독을 이었고, 노부카쓰가 오와리를, 노부타카가 미노를 領하게 되었다. 노부타카는 산보시의 후견으로서 기후 성에 놓였다. 노부카쓰는 기요스 성주가 되어 성곽과 성 아랫마을을 대규모로 개수했다. 회의 후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는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시집갔다.
歴史的な位置づけ
오다 가의 계승을 곧바로 한 사람의 성인 당주에게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린 계승자와 여러 유력자의 관계를 다시 짜는 결정이었다. 회의 후 시바타 가쓰이에는 오다 노부타카를 지지하여 하시바 히데요시와 대립했고, 이듬해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로 이어진다.
People involved
- 羽柴秀吉 (회의에 임한 네 숙로 중 한 사람) — 야마자키 전투를 거쳐 회의에 임했다. 기요스 시는 히데요시가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설명하지만, 연구에서는 회의 이후를 포함한 정치 과정 속에서 그의 위치가 변화했다고 보는 정리도 있다.
- 柴田勝家 (회의에 임한 네 숙로 중 한 사람) — 오다 가의 유력 중신. 회의 후에는 오다 노부타카를 지지하여 히데요시와 대립했고, 이듬해 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에 이르렀다.
- 丹羽長秀 (회의에 임한 네 숙로 중 한 사람) — 시바타 가쓰이에·하시바 히데요시와 함께 회의에 출석했다. 어린 산보시를 중심으로 오다 가를 운영하는 체제를 짜는 데 그의 처지도 중요했다.
- 池田恒興 (회의에 임한 네 숙로 중 한 사람) — 시바타 가쓰이에·하시바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덴쇼 10년 6월 27일의 회의에 출석한 네 숙로 중 한 사람.
- 三法師 (오다 가의 가독을 이은 노부나가의 적손) — 노부타다의 아들. 회의 결과 오다 가의 가독을 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실제 정치·군사상의 주도권은 주위 유력자들의 관계에 크게 좌우되었다. 훗날의 오다 히데노부.
- 織田信雄 (오와리를 領한 노부나가의 차남) — 회의 결과 오와리를 領하여 기요스 성주가 되었고, 성곽과 성 아랫마을을 대규모로 개수했다. 1584년에는 히데요시와 대립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을 잡게 된다.
- 織田信孝 (미노를 領한 노부나가의 삼남) — 회의 결과 미노를 領하고, 산보시의 후견으로서 기후 성에 놓였다. 훗날 시바타 가쓰이에와 손잡고 히데요시에 대항했으나 1583년에 패하여 자결했다.